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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드니 여행 4
    다녀오고 뭐라도 남기는 글/2021 호주 2021. 12. 17. 21:29

    아쉽게도 마지막 날이 밝았다. 첫날 도착했을 때만 해도 너무 추워서 다시 그대로 비행기 타고 돌아갈까 싶었는데, 모든 것을 품어줄 것 같이 드넓은 바다와, 넘실대는 수면 위로 함께 춤추던 가로등 불빛 같은 것들이 나의 쌀쌀했던 마음을 스르르 다 녹여주었다. 

     

     

    마틴 플레이스 역에서 아침에 친구와 만나 본다이 비치를 가기로 했다. 근데 보니까 짐도 있는데 우버 타면 더 빨리가고 가격도 비슷하고 해서 그냥 우버를 타기로.

     

     

     

    내리자 마자 일단 커피 한 잔 때리고. 내가 간밤에 만났던 영국인 썰을 풀자 친구는 참교육 과목들이 하나같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며 나의 대처를 좋아했고, 자기도 간밤에 호텔 사우나에서 만났던 플러티한 아저씨 얘길 꺼냈다. 으으... 어딜가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들이대는 사람들이 넘쳐나네. 여기가 동물의 왕국인가.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하늘 바탕에 누가누가 더 높이 올라가나 경쟁이라도 하듯 몰아치는 파도를 보니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본다이 비치로구나! 기대 하나 안 했지만 너무 멋져!

    몸을 굽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가 탈의실에 수영복으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고, 나도 화장실 다녀온 뒤 손을 씻고 있는데 옆에 있던 남자가 재채기를 크게 하더니 나더러 쏘리란다. 노 프라블럼 블레스 유!하고 나는 가방을 세워둔 곳으로 걸어갔는데 조금 있다가 그 남자가 다시 오더니, 자기 핸드폰 화면을 갑자기 들이밀며 대뜸 인스타그램을 팔로우 하라는 게 아닌가? 응? 햇볕이 너무 뜨거워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암튼 얼핏 봐보니 무슨 색칠공부 하듯이 그림을 그려놨는데 솔직히 그림이 내 스타일도 아니고, 요가 인스트럭터에 (요가 관심 X), 퍼스널 트레이너에 어쩌구 저쩌구 하길래... '아... 정말? 네 그림 베리 나이스하네'하며 20년에 걸친 사회생활 경력을 끌어모아 젠틀하게 그 분을 팔로우 해주었다. (그리고선 나중에 멜번에 돌아와서 제대로 들어가서 봤는데, 진짜 별 거 없었다. 사진도 존나 못 찍고, 그림도 나보다 별로고, 그래서 걍 다시 팔로우 취소함) 내 이름을 묻더니, 악수를 청하고, 만나서 반가웠다고 포옹까지 청했다. 시벌... 골고루 하네 진짜 1절만 해라. 마침 화장실에서 걸어 나오던 친구가 이 광경을 보고 입을 틀어막고 웃고 있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연속으로 나더러 인기 너무 많은 것 아니냐며 놀려댔는데, 이딴 변태들이 들끓는 것을 과연 인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진심으로 맘 같아선 '말 걸지 마세요'라고 써있는 하네스라도 하고 다니고 싶은 걸... 

     

    여튼 백사장에 비치타올 깔고 친구는 책을 읽으며 몸을 앞뒤로 굽고 나는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랄 것도 없고 그냥 손가는 대로 수정도 없이 선을 그었다. 눈앞에 있는 광경을 조금 더 세세히 보는 데에는 사진보다 그림이 최고인 것 같다. 물론 결과물을 놓고 봤을 땐 내 허접한 그림보다 당연히 사진이 더 멋지겠지만, 뇌리에 박히는 데에는 그림이 더 적합하지 않나 싶다. 

     

     

    이런 종류의 드레스는 가슴이 앞으로 곧 발사될 것같은 로켓처럼 크게 보여서 민망하다. 내 가슴이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실제로 그렇게 큰 것도 아닌데 본의 아니게 구라치는 것만 같아서 양심에 찔린다. '가슴, 보이는 것보다 훨씬 작음. 에이섹슈얼. 그러니 말 걸지 마셈'이라고 하네스라도 진정 장만해야 하나. 

     

    친구와 파도끝에 발맞춰 백사장을 걸으며 브론티 비치로 가는 산책로로 향했다. 미리 검색했을 때, 본다이에서 브론티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아주 절경이라는 얘기를 봤기 때문에 이번 코스에서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곳이었고, 가는 내내 친구도 나도 너무나 흡족해 했다. 

     

     

     

    보라! 이 멋진 장관을!

    선샤인코스트에 살았을 때 종종 갔던 누사 국립공원이 떠오르는 절경이었다. 멜번에 살면 이런 곳은 거의 1시간 30분 정도 운전해 나가야 볼 수 있고 그마저도 파도가 너무 높아서 해수욕으론 적합하지 않은데, 시드니는 도심에서 약 30분만 차타고 나가면 이런 곳에 다다를 수 있다니! 너무나 좋은 곳이잖아 시드니? 이래서 집 값이 천정부지로 솟구친 거였구만? 아무튼 쑤아리 질러 시드니!!!!!

     

    친구가 드레스 색이 마침 바다와 잘 어울린다고 아주 잘 골랐다며 칭찬해줬다. 크크. 하지만 뚱뚱한 탓에 키에 안 맞는 엄청 큰 사이즈를 사서 드레스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슬픈 현실은 안 비밀... 옷 사고 나올 때 마네킹 입은 것을 봤더니 원랜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것이 정석임... 큼큼...

     

    밥이 들어간 것, 그리고 어제의 맛없었던 우동의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이번엔 체인점이었던 스시트레인으로 향했다. 내 반드시 MSG 팍팍 들어간 익숙한 우동의 맛을 다시 찾아올테야, 하고 기본 우동과 새우튀김 롤을 시켰다. 한 숟갈 뜨자마자 '내가 원했던 맛이 바로 이 맛이었어!'하며 크... 소리가 절로나왔다. 전에는 인생에서 먹는 행복은 아주아주 작은 거라고, 돼지주제에 돼스럽지 않은, 말도 안되는 생각을 갖곤 했지만, 이젠 안다. 인생에서 먹는 행복은 꽤나 크다는 사실을! 먹는 것 아주아주 중요하지, 중요하고 말고. 

     

    그리고 다시 우버를 불러 공항으로 향했다. 머리가 희끗한 마케도니안 우버 기사님이었는데, 기사님의 침묵이 국룰이란 것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붙이셨다. 으아아아악. 게다가 외국인 단골 질문 중 가장 최악인 노스 코리아냐 사우스 코리아냐까지도 물어봄. 친구가 하핫 웃으며 노스 코리아라고 농을 쳤는데, 심지어 그게 농인지도 모름!!!!! 제발 그 정도의 정보도 없으면 노스냐 사우스냐 묻지도 말란 말이야. 그리고 제발 자기 자랑 멈춰주세요. 당신의 과거 이야기 하나도 안 궁금해. 당신의 형제 이야기 궁금하지 않고, 당신이 젊었을 때 축구를 했든 똥을 펐든 난 아무 관심 없고 그냥 공항으로 조용히 가고싶다고... 난 처음 몇 마디만 대꾸해주고 그 뒤론 대답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자본주의 리액션에 능한 내 친구는 끝까지 그 많은 이야길 다 상대해주었다. 내 친구, 자랑스럽다. 난 이제 그렇게 못 해. 

     

    시드니 안녕! 잘 놀다 간다. 

    곧 또 만나!

    비행기에 올라선 아이패드로 또 눈 앞에 보이는 책자를 따라 그려봤다. 생각보다 색칠공부하는 것 같고, 집중도 잘 되고, 엄청 재밌었다. 그런데 정말 내 오른쪽에 앉은 아저씨가 트림을 자꾸 하는지 냄새가 역해서 내가 토하기 직전이었다. 앞으로 겪을 10년의 멀미를 한방에 끌어당겨 올 만큼 역한 냄새였다. 그걸 주기적으로 맡고 있으니까 정말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런데 이번엔 아저씨가 대단한 쩍벌남이라 내 자리의 1/3까지 허벅지를 들이밀고 있었다. 자는 것인지 자는 척하는 것인지, 깨워서 니 다리 간수 좀 하라고 지랄할까, 마음 같아선 그놈의 다리를 도끼로 내리치고 싶었지만, 또 한번 꾹 참았다. 좋았던 시드니 여행을 이런 것으로 망칠 순 없지! 하고 이렇게 일기에나마 하소연해보았다. 

     

    시드니 여행기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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